책소개
조선의 사상, 조선의 학문
동학이 서학에 대항하기 위해 성립되었다고 보는 견해는 대표적으로 현행(現行) 중고등학교 역사 교과서의 ‘동학’ 항목 설명에서 잘 드러난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서학의 장점을 두루 인정하면서도 그 문제점을 극복해 가장 자주적(自主的)이고 주체적(主體的)인 ‘조선의 학문, 조선의 사상’을 지향하고자 했던 동학! 포함삼교뿐 아니라 서학과 민간신앙마저 널리 포함해 뭇 생명을 다 살리기 위한 새로운 생명 사상으로 등장했던 동학! 그리고 서양식 종교가 아닌 조선 땅 도학의 새로운 전개로서 경상도 경주 땅에서 처음으로 등장했던 동학! 이렇게 이해하는 것이 바로 동학을 온당하게 객관적으로 이해하는 길이다.
동학의 창시자 수운 최제우
수운 선생은 한국의 근대 종교가 가운데 처음으로 개벽 사상을 강조했다. 원래 개벽이란 말은 주역(周易)에서 유래하지만, 그것이 우리 한민족의 역사에서 새롭게 조명받기 시작한 것은 수운 선생 덕분이었다. 그런데 선생은 개벽을 말하되 ‘다시 개벽’, 즉 후천개벽(後天開闢)을 말했다. 왜 후천개벽을 말하지 않으면 안 되었을까?
선생은 일찍이 20세를 전후해 10여 년 이상 전국을 방랑하며 세태 변화와 인심 풍속의 해이 현상을 목격했다. 선생의 눈에 비친 세상은 한마디로 요순(堯舜)의 정치로도 부족하며 공맹(孔孟)의 말씀으로도 부족한 시대였다. 잦은 민란(民亂)과 자연재해, 가뭄과 흉년, 횡포한 관리들의 가렴주구 등으로 풀뿌리 민중이 목숨을 제대로 부지할 수 없던 시대, 서양 제국주의 열강이 동점(東漸)해 오면서 중국을 비롯한 아시아 여러 나라와 싸워서 이기는 바람에 우리나라에 언제 순망치한의 민족적 위기가 찾아올지 예측할 수 없는 불안한 시대.
젊은 시절에 전국을 방랑하면서 온갖 모순으로 가득한 시대 상황을 온몸으로 체험하는 동시에, 고통의 나날 속에서도 개벽이 어서 빨리 찾아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리는 민심을 읽었던 선생은 마침내 1860년 4월 5일에 득도를 하고 나서, ‘다시 개벽’의 새 세상이 오고 있음을 소리 높여 외치기 시작했던 것이다.
200자평
우리는 동학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가. 서학에 대항하기 위한 이데올로기? 유불선 삼교의 혼합 사상? 이 수많은 오해에 대한 답이 동학의 핵심 경전 ≪동경대전≫에 들어 있다. 동학은 ‘믿는다’ 하지 않고 ‘한다’고 한다. 동학은 사람이 마땅히 배워야 할 길이요 실천해야 할 학문이라는 뜻이다. 혼란스럽기 그지없는 19세기에 우리 학문, 우리 종교로 등장했던 동학의 핵심 경전을 원전 그대로 읽을 수 있다.
지은이
최제우는 동학 창시자이며 호는 수운(水雲)이다. 1824년 음력 10월 28일 경상북도 월성군 현곡면 가정리에서 몰락한 양반 근암 최옥(崔鋈)과 재가(再嫁)한 어머니 한씨(韓氏) 사이에서 서자(庶子)나 다름없는 신분으로 태어났다.
10세 때 모친을 잃고 16세 때 부친마저 잃는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으나 다행히도 부친으로부터 유학을 체계적으로 배울 수 있었다. 19세(1842) 때 울산 박씨와 결혼하고, 20세 때 화재로 생가가 전소되자 이듬해부터 전국을 유랑하는 일종의 구도의 길에 올랐다. 31세(1854)까지 10년 이상 전국 각지를 유랑하며 유불선(儒佛仙) 삼교, 서학(西學), 무속(巫俗), ≪정감록(鄭鑑錄)≫과 같은 비기도참사상 등 다양한 사상을 접하는 동시에, 서세동점과 삼정문란(三政紊亂)이라는 이중의 위기에서 고통당하는 민중의 참담한 생활을 직접 체험했다. 32세(1855)에 우연히 ≪을묘천서(乙卯天書)≫라는 비서(秘書)를 얻어 일종의 신비 체험을 한 끝에 경상남도 양산 통도사 근처에 있는 천성산 자연 동굴에 들어가 49일 기도 생활을 했다.
생계를 꾸려가기도 힘든 지경에 처한 가족을 처가에 맡긴 채 구도 생활을 계속하던 수운은 36세(1859)가 되던 해에 오랜 유랑 생활과 처가살이를 청산하고 고향 용담으로 돌아와 정착하기에 이르렀다. 고향에 정착한 지 1년 뒤인 1860년 음력 4월 5일에 수운은 아주 특별한 체험을 하기에 이른다. 이른바 ‘천사문답(天師問答)’이라고 불리는 하늘님과의 문답 끝에 동학을 창시하게 되었다.
그러나 수운은 동학을 펴기 시작한 지 만 3년도 되지 않은 1863년 12월에 체포되었고, 이듬해 3월 10일 ‘삿된 도로 정도를 어지럽혔다는 죄(左道亂正之律)’로 대구 경상감영 안의 관덕정(觀德亭) 뜰 앞에서 처형당함으로써 죽음을 맞이했다. 이때 그의 나이 41세였다.
옮긴이
박맹수는 한국근대사 및 일본근대사를 전공했다. 1955년 전남 벌교에서 출생해 원광대학교 원불교학과를 졸업한 후, 한국학중앙연구원 부설 한국학대학원에서 <해월 최시형 연구>로 박사학위를 취득했으며, 일본 북해도대학 대학원 문학연구과에서 <근대한국과 일본과의 관계?동학사상, 갑오농민전쟁, 청일전쟁을 중심으로>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영산선학대학교 교수를 거쳐 원광대학교 원불교학과에 재직 중이다.
학문적으로는 동학과 원불교를 비롯한 한국근대 민중종교 사상을 세계사적 관점에서 재조명하는 작업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한중일 삼국의 풀뿌리 시민 교류 활동을 통해 동아시아의 평화와 공생의 길을 열어가는 시민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차례
1. 포덕문(布德文)
2. 논학문(論學文)
3. 수덕문(修德文)
4. 불연기연(不然其然)
5. 축문(祝文)
6, 주문(呪文)
7. 입춘시(立春詩)
8. 절구(絶句)
9. 강시(降詩)
10. 좌잠(座箴)
11. 화결시(和訣詩)
12. 탄도유심급(歎道儒心急)
13. 결(訣)
14. 우음(偶吟) 1
15. 팔절(八節)
16. 제서(題書)
17. 영소(詠宵)
18. 필법(筆法)
19. 유고음(流高吟)
20. 우음(偶吟) 2
21. 통문(通文)
22. 통유(通諭)
23. 포덕식(布德式) 외
24. 무자판 발문(戊子版 跋文)
참고문헌
해설
지은이에 대해
옮긴이에 대해
책속으로
모심[侍]이란 안으로 신령함이 있고 밖으로 기화가 있으며 온 세상 사람들이 각각 자기의 본성으로부터 옮기지 못할 것임을 안다는 뜻이다. 주(主)란 존칭해 부모처럼 섬긴다는 뜻이요, 조화(造化)는 억지로 하지 않아도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며, 정(定)은 하늘의 덕에 합일해 하늘 같은 마음을 정한다는 뜻이다. 영세(永世)는 사람의 한 평생이요, 불망(不忘)은 언제나 마음속에 간직해 잊지 않는다는 뜻이며, 만사(萬事)는 수가 많다는 뜻이고, 지(知)는 하늘의 도를 알아서 하늘의 지혜를 받는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밝고 밝은 하늘의 덕을 생각하고 또 생각해서 잊지 아니하면 지극한 지기(至氣)로 화하여 지극한 성인의 경지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15~16쪽
우리 도는 넓고 크나 간명해서
많은 말과 뜻이 필요하지 않다.
다른 도리가 따로 있지 않으니
정성[誠]과 공경[敬]과 믿음[信] 석 자,
그 안에서 열심히 공부해
투철한 뒤라야 비로소 알 수 있느니라.
잡념이 일어나는 것을 염려하지 말고
오로지 깨달음이 더딘 것을 걱정할지니라.
-52쪽